문화적 경영으로 풀어보는 노사문제 -유인학
문화적 경영으로 풀어보는 노사문제
柳 寅 鶴 사장 / 한국조폐공사
1. 우리의 문화
가. 문화의 의미
모든 분들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정확한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양식을 정하는 것이 문화다. 사람이란 아주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아프리카의 토인이나, 남양군도에 있는 미개한 야만인이거나, 아주 발달한 서양사람이거나 동양사람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기본적으로 원숭이 단계를 지나서 사람이 되면 다른 것보다는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인간사회를 이룩하면서 구체적으로 지역사회, 국가사회, 권역별 사회를 이루어 나가면서 많은 차이를 가져오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들여다보면 미국사람, 아프리카 사람, 러시아 사람이 먹고, 입고, 쓰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요소가 무엇이겠는가? 가령 자원이 없는 이스라엘도 오늘에는 선진국으로 갈 수가 있고 자원이 많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는 한때는 발전했었지만 지금은 주저앉고 있다.
과연 무엇이 민족과 국가와 지역에서 차이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 학자들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종교의 차이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전통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인종의 차이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물학적으로 흑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해 보았자 1등 국가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백인은 아무리 못해도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같은 백인인데도 유고슬라비아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가 싸우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그러한 삶의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가? 가장 큰 요인은 문화다. 문화의 차이가 각 국가와 민족에 큰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대단히 광범위하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양식이 대단히 광범위하다. 일반적으로 말이 같으면 비교적 문화의 동질성을 갖는다. 또 관습이 같으면 같은 문화를 갖는다. 거기에다 종교가 같으면 문화의 동질성이 더 심해진다. 인종이 같으면 그렇다.
그러나 똑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떤 때는 많은 문화의 차이가 있다. 사고방식의 차이와 행동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여러 가지 공통적인 요인 요소를 분모로 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 사고의 체계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나. 장성의 지역문화
장성 군민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어떤 문화이겠는가? 내가 아직 전문적으로 분석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중의 하나이고, 남도의 사투리가 통하고, 남도의 창이 통하는 전라도의 하나이고, 유교적 전통이 강하며 동시에 상무대가 있고 광주 주변으로 도시화되어가기도 하지만 상당히 한국적 전통이 강하게 있는 사회다. 기본적으로는 농촌사회이지만 도시 주변으로서 상당히 발전 지향적인 문화가 장성의 하나의 특징일 것이다. 나머지는 다 똑같다. 어디에 가나 문화의 보편화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장성을 말할 때 ‘유림의 고장’이라 하기도 하고 ‘의로운 고장’이라 하기도 하고 ‘학문의 고장’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 전남에서는 일반적으로 ‘광나장창(光羅長昌)’이라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유교문화가 가장 발달되고 향교가 가장 드센 지역이 광주(光州), 나주(羅州), 장성(長城), 창평(昌平)이다. 창평은 담양으로 편입되었다. 광주는 전라도의 수도가 되어 전체적 문화가 상당히 훼손되고 새로운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다.
장성은 전통적 문화를 가지면서 즉,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켜 가는 사회다. 이것이 하나의 장성문화의 기본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문화적 요소를 키워나가야 장성이라는 지역사회가, 장성군민이 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살수가 있겠는가? 유교적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닮든지 아니면 기독교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인도주의적 정신이 있든지 아니면 하나의 인본주의적인 휴머니즘을 가져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원래 장성은 한반도 남쪽 호남의 중심부분에 해당된다.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중국의 태산을 원점으로 삼고 백두산을 간동으로 하고 백두대간을 쭉 내려오다가 장성이라는 곳은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지역이기 때문에 땅의 정기가 많이 모인 지역이다. 이러한 산악지대와 더불어서 옆에는 황룡강이 있어 평야지대다. 이런 곳이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아직까지 여섯 개의 서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으로 추앙되는 고장이다. 반면 일본사람들은 전라도에서 제일 껄끄러운 지역이 삼성삼평(三城三平 - 長城, 寶城, 谷城, 昌平, 南平, 咸平)이라고 했다.
장성 사람들이 왜 존경받을 수 있는가? 하나는 자랑스러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장성은 마한시대 때 구사오단국, 고랍국, 임소반국이라고 추정되는 부족국가들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황룡강과 진원면쪽으로 고도의 문화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나오지 않지만 아직도 여러 군데에서 고인돌이라는 지석묘가 나오고 있다. 이런 전통적 우리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고 백양사를 위시한 불교문화의 찬란한 전통이 있으며 많은 유교적 선인들이 있다.
이것만 가지고는 장성 사람들이 절대로 존경받을 수가 없다. 이렇게 유교적 전통이 강하지만 개혁적인 동학란때 마지막 시산혈해를 이루었던 전투장이 여기에 있었다. 과거에 비교적 그 체제에서는 혜택을 누렸던 유림이나 토지자본가로 일컬어지는 지주들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민족적 생존을 위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과거 양반이나 선비들이 유교적 전통만을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도 앞장섰던 출신들이 있는 고장이다. 또 근래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다.
다. 한반도의 선사시대 문화
나는 결코 편협한 지방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원래 법과대학 교수이고 국회의원을 했고 지금은 조폐공사 사장을 하고 있는데 엉뚱하게 ‘고인돌 보존운동’을 펴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 한국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특히 전라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 운동을 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신라 건국이 서기전 57년이다. 고구려 건국은 서기전 35년, 백제가 기원전 18년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단지 두 페이지 반밖에 없고 단군을 빼면 우리 삼한에 대한, 마한에 대한 역사가 한 페이지도 안 된다. 그러나 한반도에 한민족의 형성에 관한 과정을 초등학교 때 배운 사람은 우리의 조상은 단군 왕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한민족은 인종적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혼합종이다. 남방민족과 북방민족이 혼합된 민족이다.
원래 한반도에는 고아시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민족이 있었다. 고아시아인은 중국의 산동지방에서부터 일본 유구지방에 까지 다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7,000년 전쯤부터 약 천년간 한반도에서 자취가 없어진다. 그게 신아시아인으로 발전했는지는 모른다. 이런 고아시아인이 나중에 한반도 남쪽에 하나는 폴리네시아계통이라고 일컬어지는 필리핀인종과 비슷한 사람이 옮겨왔고 5천년 전에는 남중국에서 해류를 타고 벼농사를 짓는 우리의 선조들이 이곳으로 왔다.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해류가 북풍이 부는 겨울에도 한 시간당 0.7노트씩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상해에서 배를 타고 가만히 두어도 여름에는 일주일이면 한반도 남쪽에 도달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남방민족이, 그것도 인도에서 벼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남중국으로 옮겨오고 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정착했던 곳이 한반도의 영산강과 금강유역이다.
사람이 유목생활을 하다가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가장 많고 사람을 많이 부양할 수 있는 것이 벼농사다. 엄청난 산업혁명을 가져 온 것이다. 4,000~5,000년 전에는 벼농사를 짓는 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벼농사를 짓는 우리 민족이 4,000~5,000년 전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반도에 건너왔다. 우리 전라도 지방에 있는 470여 가지 단어가 인도어이다. 벼가 인도 말이다. 쌀은 사울이라는 인도 말이다. 나락, 이랑, 물도 인도 말이다. 사람의 중요한 부분인 팔, 겨드랑이, 사타구니도 인도 말이다. 이러한 인도 말을 하고 벼농사를 짓던 민족이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한반도에 왔다. 특히 본격적으로는 중국의 대변화로 인해서 진시황이 통일을 하고 나서부터 북방족이 한반도에 서서히 내려온다.
전라도 지역은 그때 마한, 진한, 변한 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지역에는 신석기 문화와 더불어서 2,300~2,400년 전 철기문화가 청동기 문화였다. 청동기 문화를 쓰던 이 지역에 북방계통에서 몽골리안 계통, 만주족계통의 북방족이 철기를 가지고 오자 문화가 덜 발달한 삼한중 진한의 경상북도나 변한의 경상남도는 먼저 정복을 당하게 된다.
경주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라고 한다. 김알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전한이 망하고 후한때 왕망이는 말고삐잡이로서 흉노족의 네 번째 인질이었다. 왕망이가 집권하고 나니 덩달아서 사복시가 말을 기르는 총대장을 하다가 왕망이가 16년만에 망하니까 동쪽으로 와서 신라로 왔다는 것이 경주 김씨의 통설이다.
지금부터 약 2,100년 전에 전한과 후한 사이에 있었던 화폐가 그곳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북방족이 한반도에 오면서 문화가 덜 발달한 마한과 진한은 정복했지만 우리 쪽은 정복하지 못했다.
부여족의 일종인 백제가 장성 갈재를 넘는데 500년이 걸린다. 백제의 건국은 기원전 18년 전이지만 근초고왕 17년, 27년, 바꾸어 말하자만 지금부터 1650년전 경에야 비로소 백제의 군대가 장성 갈재를 넘어서 해남까지 와서 그것도 이 지역을 백제 영토에 편입을 시키지 못하고 제주도 태수까지 불러다가 항복만 받고 돌아간다.
그리고 동성왕 10년에야 전라남도 지역과 고창, 부안까지 백제 영토에 포함이 된다. 백제의 역사는 한성시대 475년, 공주시대 75년, 부여시대 146년 이렇게 해서 약 900여년 역사인데 그 중에 전남이 백제 영토가 된 것이 약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백제권을 개발한다고 할 때 1조 3천억을 썼지만 전라남도는 백제의 유물이 없기 때문에 광주에 있는 고성복원에 20억밖에 배당할 수가 없었다.
이 지역은 마한국이었다. 이병도 선생에 의하면 마한은 48개국이고 진한 12개국, 변한도 12개국이었다. 원래 마한의 영토는 황해도 연변까지였는데 점점 북방족에 밀린다. 그 중에 가장 결정적으로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한테 속아서 나라를 빼앗긴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피난을 오니 준왕이 변방의 장수를 시킨다. 평양성을 지키는 수비대장을 시켰는데 쿠테타를 일으키자 준왕이 도주를 해서 남쪽으로 온다. 제일먼저 도읍을 세웠던 곳이 충청북도 진천이다. 거기서 또 밀려서 익산 쪽으로 온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1650년전부터는 마지막 마한세력이 밀려왔던 것이 전남지방만 보존하게 된다. 마한족이 밀리면서 한쪽은 남쪽으로 오고 또 한쪽은 일본열도로 가고 일부는 다시 북서풍을 따라서 중국 쪽으로 가기도 했다.
마한족의 가장 큰 특징은 남쪽에서 벼농사 지었던 남방식 고인돌을 만든 민족이라는 것이다. 유목민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을 하게 된다. 한반도는 수수 같은 곡식을 재배했다. 그러다가 약 5천년 전부터 벼농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벼농사의 화분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사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쌀 중독에 걸리면 못 벗어난다. 서양 사람도 쌀을 먹기 시작하면 쌀밥을 잊지 못한다. 쌀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가장 높아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음과 동시에 맛이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쌀 농사를 짓는 민족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말이다. 메뚜기는 인도 말이다.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성기도 인도 말이다. 우리 민족은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이 합해져서 남쪽사람들 위주였기 때문에 사람의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남쪽에 있었던 마한 사람들의 언어가 지배 언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남쪽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특징은 첫 번째가 말이고 두 번째가 벼농사다. 세 번째는 고인돌이고 네 번째가 몽관묘이다. 세계의 어느 민족이든지 정착하면서부터 사람이 죽으면 옆에다 묻고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 자기 조상이 묻힌 곳에 열심히 절을 하다보니 성지가 되어 나중에는 돌 자체를 숭상하게 된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문화는 돌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부터 500년전 켈트족이 만들었던 영국의 스톤헨지라든지 아일랜드의 뉴그랜즈. 프랑스의 약 4천년에 만든 까르낙의 고인돌. 지중해 가운데의 몰타란 섬에 있는 4천년의 고인돌. 옛날 12,000년전부터 800년전사이에 알래스카를 건너서 미국으로 갔던 아메리칸 인디언들도 전부 고인돌을 만들었다. 고인돌이 없는 민족은 옛날 문화가 없는 야만족이다. 고인돌이 가장 없는 민족이 미국이다.
이러한 고인돌이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바에 의하면 전 세계에 6만 5천개쯤 된다. 그 중에 4개는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아일랜드, 영국, 몰타, 남미의 콜럼비아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6만 5천개의 고인돌 중에 우리 한반도에 3만 5천개가 있다. 45%가 한반도에 있다. 남한에 약 2만 5천개가 있다, 고인돌이 울릉도에도 있고 한반도 전역에 다 있다. 그러나 유난히 전라남도 변경지대에 1만 9천개가 있다.
내가 1990년부터 고인돌 세계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하니 갑자기 북한에서 북방식 고인돌이 1만개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에는 주로 황해도와 평안남도 즉 임진강 유역과 대동강유역에 있다. 물론 고인돌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세계의 고인돌 6만 5천개중에 45%가 한국에 있고 그 중에 1만 9천개가 우리 전남지방에 있다. 한국은 고인돌의 축조연대가 3천년 전부터 2천년 전으로 약 천년 사이다. 유럽보다는 늦지만 한국에 그 개수가 가장 많고 유일하게 남방식, 북방식, 혼합식이 있다. 한국은 고인돌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고인돌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강화, 고창, 화순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난번에 심사는 끝났기 때문에 6월중에 심사가 되면 금년 중으로 지정이 될 것이다.
유네스코가 문화적으로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다섯 개다. 첫 번째가 비원이고 두 번째는 종묘제례악, 세 번째는 석굴암. 네 번째가 팔만대장경, 다섯 번째는 수원 화성이다. 비원이 우리 나라의 정원으로서 문화유산이 되었지만 중국 자금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규모가 작아서 궁궐로서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한국적 정원으로 인정받았다. 종묘제례악이 비록 조선의 열성자를 모시는 아악이지만 중국의 당악이다. 중국의 당악을 가장 올바르게 보존하고 있는 것이 한국 아악이다. 석굴암은 부처님의 곡선미가 아름답다. 그러나 중국의 용강석굴에 비하면 4분의 1도 안 된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으로 목각화된 경판으로서는 제일 많으나 800년전에 만들어진 역사가 길지 않은 유물이다. 수원 화성은 심재택 수원시장과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다. 한국의 문화는 효의 문화다. 수원 화성은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를 그리는 정조대왕이 아버지를 그리며 쌓아놓은 성이니 효(孝)문화의 극치이고, 성을 쌓을 때 돌마다 이름을 새겨 넣었으니 건축실명제의 극치라고 하였다.
3천년 전부터 만들어진 우리의 고인돌이 아직도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지 않았다. 장성만 해도 덕재리와 쌍웅리에 지석묘단지가 있다. 남방식과 혼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경주 땅과 남산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 관광객이 더 이상 가지 않는다면 안동 하회마을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될 수가 있다.
일본이 문화적으로 콧대가 샌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화유산이 9개밖에 안 된다. 중국은 11개다. 한국은 5개다. 기록에 의하면 마한국가는 중국의 연나라 때만 하더라도 여섯 번이나 사신이 왕래했다. 일본 초기의 야마토 국가의 시조가 영산강 아니면 금강유역에서 갔다. 마한 유족이 쫓겨서 간 것이다. 왕인 박사나 최치원이 일본을 갈 때 영암을 지나갔다. 고흥앞 바다에서 배나 나무를 타고 있으면 해류에 의해서 후쿠오카나 나가사키 쪽으로 간다. 부산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으면 해류를 타고 니가타 쪽으로 간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돛을 이용하는 기술이 생기고 항해술이 발달한 것은 지금부터 1800~1900년 전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상도쪽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그 전에는 일본에 가려면 전라도로 와서갔다. 제일 빨리 가는 길이 고흥쪽에서 가야 되는데 고흥은 해적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로 서해안으로 많이 갔다.
일본은 테라스 오미카미라는 하늘에서 여자 천황이 내려와서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한반도에서 간 것이 분명하다. 일본 구주지역에 그 당시에 16개 국가를 통일했던 사람은 기미코라는 일본천황이다. 기록에 의하면 하늘에서 왔고 머리를 풀고 말을 못했는데 동생을 통해서 말을 했으며 천지조화를 할 수 있는 귀신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간 것이 분명하다.
우리 나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합해도 세계 문화유산이 하나도 없다. 전라도는 문화의 고장이고 학문의 고장이라고 소리 높여 자랑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문화유산이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문화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세계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인돌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장성만 하더라도 황룡강 주변에 있는 고인돌을 여러분들이 없애버렸다. 잘살아보자고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없애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조상이 묻혔고 우리 조상들이 경배했던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우리 스스로가 없앤 것이다.
라. 문화의 중요성
지역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문화적 체계가 제대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역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훌륭한 문화를 가졌다는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위조문서가 성경이고 그 다음이 우리 나라의 족보다. 예수님은 단 한 줄도 말씀을 쓴 적이 없다. 공자님은 논어라도 지었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한 줄도 자기가 쓴 글자가 없다. 제자들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써 놓았기 때문에 성경은 인류의 가장 찬란한 도덕 교과서이고, 역사문서이고,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서이다. 한국 사람 145개 성씨의 근원은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의 족보를 보면 황제 신농씨부터 시조가 나와서 단군까지 5천년 역사가 우리 족보에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족보를 챙긴다. 전쟁이 나도 족보를 가지고 다녔다. 나중에 비빌 언덕만 있으면 문서를 조작해서 다 양반이 되었다. 그게 나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 가문에 대한 평가를 높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양반답게, 선비답게 훌륭한 집안답게 평가하다 보면 행동거지가 사람다워지고 교육적이고 인간답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이나 불경이나 우리 족보같이 인간 교육을 위해서는 더 좋은 문서가 없다. 가장 많이 위조된 문서이지만 교육적 효과는 대단하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존대할 줄 알고 자기의 사고를 높은 가치 기준에 둘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장성군민 여러분들은 소득이 광주사람보다 떨어진다. 과거에는 전남하면 광양에서 얼마가 나왔고 장성에서 얼마가 나왔다고 하지만 현재는 장관이 몇 분밖에 안 나왔다. 장성군민답게 찬란한 문화를 가졌고 과거 우리문화가 불교문화이고 유교문화라면 하나의 불교가 자리하고 유교문화의 전통을 가짐과 동시에 높은 선비정신과 바른 행동규범이 장성인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이조가 500년 동안, 신라가 800년 동안, 백제가 거의 800년 동안 나라를 지탱하였다. 중국은 대부분 200년이면 왕조가 망한다. 한국사람은 비교적 물질을 숭상하지만 정신적 세계에 대한 하나의 고급가치를 지향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조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 모든 사람들이 유교적 가치, 이조적 가치, 도덕적 가치를 따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이 한국의 정신을 없애려고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이라고 하였지만 원래는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고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고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이었다.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북쪽문을 열어놓으면 음풍이 들어와서 가문이 망하거나 여자가 바람난다고 해서 닫아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홍기문 이라고 하였다.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홍기문, 유교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인, 의, 예, 지를 지켜놓고 한가운데에 보편적 신의를 그래서 서울 한 복판에 보신각을 만들었다. 그때는 4대문의 중심이 보신각이었다. 일본사람들이 4대문 이름을 다 바꾸면서 보신각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이 이조를 500년 동안 지탱하게 만든 것이다.
장성의 여러분들께서는 이 좋은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장성은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도 했다. 그런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부자로서는 존경받지만 한국적 가치에 맞는 의로운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은 되지 않는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이루는 것이 장성의 참다운 지역문화를 이루는 것이다. 한민족으로서 보편적 문화가치를 이루고 있고 호남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하나의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장성사람이 가질 수 있는 높은 문화의식과 하나의 문화양식을 여러분들이 개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한 지역사회의 개발도 다른 지방 같으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두 배가 세 배정도 걸릴 것이다. 다른 지역은 기본적으로 돈을 버는 것 위주다. 돈을 버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사회의 기본적 도의, 기본적 덕목, 기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이런 것이 장성의 가치이다. 그리고 지역사회 발전에 원동력이 되는 하나의 기본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공장을 유치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모두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장성적 가치를 그렇다는 것을 말씀 드린다.
요새는 누구나 굶지 않고 옷도 입고 산다. 의식주는 웬만큼 충족되어 있다. 그러나 의식주가 충족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권력이란 것은 정상이 가까울수록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부라는 것도 정해져 있다.
2. 한국조폐공사의 문화적 경영
가. 노사문제
조폐공사는 생산공장이다. 조폐공사는 설립된 지 49년이 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화폐, 우표, 수표, 주민등록증, 여권, 훈장 이렇게 일관된 생산을 하는 나라는 세계에서도 네 개 나라밖에 안된다.
조폐공사는 가장 유명할 정도로 극심한 노사분쟁을 겪어 왔다. 지난해에 유명했던 특검제가 있었는데 옷로비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이었다. 조폐공사는 과거에는 기본적으로 인쇄가 아니면 주물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손으로 하였다. 그런데 기계화가 되다보니 감원을 많이 시켰다. 정확히 1998년 9월에 2,700명, 9개월 사이에 1,200명을 감원하고 1,500명으로 사람을 줄였다. 45% 감원을 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의 어떤 기관도 45%를 감원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러다 보니 노조가 최고로 강해졌다. 조폐공사가 생산을 중단하면 은행이 마비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지 못하고 훈장을 주지 못한다. 오랫동안 파업하고 마지막에 연말에 오버타임하면 1.5배의 노임을 더 받는다. 그렇게 해도 노조는 괜찮다.
이러다 보니 세계 조폐공사 중에서 파업권을 가지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 조폐공사밖에 없다. 이태리는 사회당과 공산당 연립정권하에서 조폐공사가 파업을 하니까 화폐발행권만은 중앙은행이 회수하였다. 미국 대통령 경호를 FBI가 하는 게 아니라 재무성 직원이 한다. 미국의 조폐공사도 재무성 직원이 기관단총을 들고 경비를 한다. 중국도 권력의 유지를 18,000명쯤 되는 무경이라는 강택민 직속의 경찰이 하고 있다. 중국무경은 헵리콥터도 있고 탱크도 있다. 중국의 조폐공사도 무경이 직접 나와서 지키고 있었다. 돈을 만드는 곳이 문제가 있다면 국가경제가 얼마나 흔들리겠는가?
과거에 정통성 없는 노태우 정부하에서 노조를 인정함과 동시에 파업권까지 인정해 주었다. 이래서 1997년은 분쟁일 수 222일. 파업신고일수 111일, 파업을 67일간 했다. 67일간 파업을 하면 일요일과 휴일을 합하면 약60일쯤 된다. 1998년만 하더라도 분쟁일수가 12일쯤 되고 파업을 약 50일쯤 했다. 작년에 모든 기관들이 파업을 했는데 유일하게 조폐공사 노조만 파업을 하지 않았다.
나. 노사문제의 해결
8월 2일에 내가 부임을 하는데 노동자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대모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서 4시에 취임인사를 하였다. 그 동안에 옆에서는 꽹과리와 북을 치고 해서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정확히 5시에 전화가 왔다. 직원들에게 부임인사를 했으니 노조에 와서도 부임인사를 하라고 했다. 나는 일거에 거절을 했다. 다행이 그날 폭풍우가 불었다.
조폐공사는 대덕과학단지내에 있고 가급 보안시설이니까 노조가 들어오면 못 말리지만 그래도 총을 들고 지키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다. 주로 학생들과 서울에서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옥천창의 비어있는 곳에 가서 그 다음날 10시 30분까지 꽹과리를 치고 북을 치면서 사장보고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옥천경찰서장이 김강자씨였는데 사장이 얼른 와서 인사를 하든지 해서 수습하라고 전화를 했었는데 나는 절대 안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조회를 하면서 내가 그랬다. 첫 번째로 오늘부터 현관을 롯데호텔 수준으로 꾸미고 사장실도 돈을 들이지 말고 최고로 꾸미라고 했다. 그리고 서로 즐겁게 살자고 했다. 조폐공사에 천당과 극락을 건설하자고 했다. 천당과 극락이란 가정에서 행복하고 직장에서 행복하면 기독교인에게는 천당이요. 불교인에게는 극락이다. 나머지 시간도 행복하면 그 사람은 성인이거나 도인이다. 가정에서 행복하고 직장에서 행복하려면 출근시 현관부터 일류호텔에 들어가는 기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당장 현관을 최고 수준으로 꾸미라고 했다.
다음에 앞으로 조폐공사의 노사문제는 한국의 국가 정권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중요한 문제인데 당분간 내가 노동자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태풍이 일어날 때는 집을 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정조사나 청문회, 국정감사, 특검제가 시행되는 기간에 나는 노조 사람을 만나기는 해도 협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협상은 일괄타결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노사협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노조 사무실에 갔더니 1/3은 누워있고 1/3은 반쯤 비켜서고 1/3은 악수를 하는데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가는 곳마다 민노총 일꾼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와서 정문에서 막아버려 차가 들어가지 못해서 걸어서 들어갔다.
부여창에 갔더니 거기에 있는 노조지부장이 나를 가로막으면서 욕을 하면서 김대중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싸웠는데 민주정권이라 하더니 그 정권 밑에서 8개월간 징역살이를 하다 왔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뺨을 맞아 보았는가? 밥을 굶기던가? 혹시 물 고문이나 전기고문을 당해보았는가?” 그 사람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내가 그랬다. 당신들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에도 조합에서 한 달에 150만원씩 주었다. 감옥에 가 있다고 해서 당신들 집이나 이웃사촌까지 가택수택을 하지도 않고 뺨도 때리지 않았다. 우리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을 때는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똥물까지 다 토했다. 그러니 내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 공동체적 기업문화의 형성
조폐공사의 노사문제를 풀기 위한 방법은 문화적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생리적 생존욕구를 충족시켜야 되는데 그 이상 더 고급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문화적 삶을 살아야 한다. 보다 더 공통적 가치, 보편적 가치를 향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첫 번째로 내가 시행한 것은 전혀 엉뚱하게 역사탐방을 가자고 하였다. 대전과 부여지역이니 마한의 역사를 찾아서 익산 쪽으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 가서 단 한마디도 경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조폐공사에 내가 있을 때 청주고 동창회밖에 없었다. 옛날에는 축구부도 있고 합창부도 있었다고 했다. 만나면 서로 싸우기만 했다. 그래서 인간대 인간 사이의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신뢰를 회복하려면 우리 공통의 문화적으로 접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엉뚱한 제의를 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 조폐공사의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조폐공사의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폐공사는 국가가 66억을 출자하였고 90%의 제품을 사주고 국가가 주인이다. 우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나는 앞으로 3년 임기동안 밖에 일을 할 수 없는 임시직원이고 여러분들은 58세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정식직원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직장이고 나는 아무리 잘해보았자 3년 후에는 떠날 사람이다. 내가 이곳에 올 때 가방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내가 떠날 때도 가방하나만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조폐공사의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하겠는가 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보겠다. 옛날에 NCR이라는 계산기가 있었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2차 대전 때 NCR의 4대 회장의 아들인 알린이 독일에 있는 NCR공장에 갔더니 어떤 어수룩한 거지 둘이서 벽돌을 치우고 있더라는 것이다. 독일 공장에서 일하던 공장장은 나치한테 죽었고 그 밑에서 일하던 총무와 기술책임자가 1936년에 문을 닫았고 폭격에 의해서 없어진 NCR공장의 벽돌을 줍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붙잡고 알린이라고 했더니 그들은 “당신이 올 줄 알았다”며 울었다. 이틀동안 같이 벽돌을 치우고 있으니 이틀 후에 탱크소리가 나더니 어떤 흑인 병사가 경례를 붙였다. 깜짝 졸라서 알린이 “나는 미국사람이다”라고 했다. 미국 NCR에 근무하던 사람으로 탱크병 인데 그 옆을 지나다가 그곳에 NCR공장이 있다고 해서 와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서로 붙잡고 울고 나서 먹을 것을 다 주고 갔다. 그 NCR은 그런 돈독한 공동체적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미국의 유수한 기업이다.
옛날에 내가 장가를 들 때만 해도 제일 호사스러운 것이 RCA 텔레비전과 빅터 레코드였다. RCA를 창업한 사람이 산호프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기술제일주의자였다. 기술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했다. RCA에서 TV를 제일 먼저 만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일본사람들이 TV를 더 잘 만들게 되어 시장점유율이 떨어지니까 그의 아들은 사장중심주의 택했다. 시장을 확대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그의 손자는 다시 기술제일주의를 지향했다. 지금은 RCA라를 회사가 형체도 없이 되었다. NCR은 기업문화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어떤 어려움이든지 같이 극복하면서 기업의 공동체적 문화를 가지고 상황변화에 따라서 발전하고 있지만 RCA는 기술만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없으니까 그 기업은 없어지고 말았다.
한국도 큰 기업에는 몇 가지 공동체적 문화가 있다. 현대는 뭐니뭐니 해도 행동주의다. 정주영씨는 불도지식으로 밀고 나간다. 심지어는 서산에 둑을 막을 때는 방법이 없으니까 낡은 배를 가져다가 침몰시켜서 일을 했다. 중산 화력발전소를 지을 때 내가 우연히 그 옆에 있었는데 일을 잘 못하니까 쫓아가서 직원을 발로 차기도 했다. 삼성은 품질주의다. 선경은 기술본의주의다. 대우는 그 나름대로 세계주의자였다. 그런 공동체적 문화를 가진 기업은 살아 남는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일을 하는 것이 봉급만 타기 위해서 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더 좋은 자리가 있으면 언제든지 미련 없이 떠나고 잘못하여 대립관계가 되면 동료도 고발하고 상사도 고발하게 된다. 노사관계로 얽히면 자기 직장도 부수어 버린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잘되는 이유가 있다. 시애틀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가보면 직원들이 세계의 문화를 내가 선도한다는 자부심과 더불어서 미국에 유리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유리하고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유리한 것은 미국에 유리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유리한 것은 인류에 유리하다라는 확고한 문화적 우월주의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본적 사고와 행동을 문화로서 바꾸는 것이다. 교육은 그러한 사고와 행동을 문화로 바꾸는 것이다. 교육은 그러한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라. 세계수준의 생산성 향상
우리 조폐공사는 전혀 협상하지 않다가 민노총이 노조 전임자 문제로 11월 중순에 전국적인 파업을 시행하기 때문에 노조에서 3명. 회사에서 3명, 대학교수 2명, 노조는 민노총 중앙본부 충청본부를 대둔산 호텔에 있게 하고 여기서 기본적으로 모든 걸 논의하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집중협상을 했다. 48시간 동안에 2시간만 자고 협상을 했다. 노조위원장이 마흔 한 살 먹은 사람인데 나하고 둘이서 48시간동안 계속하니까 나중에는 노조위원장이 눈이 보이니 않는다고 했다. 타협을 해서 성공을 하면 내가 보람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미련 없이 그만두겠노라고 했다. 노조에서 너무 말을 듣지 않기에 내가 사장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대신에 30~40명쯤 파면조치를 할 테니 양쪽 다 똑같이 악업을 지고 같이 떠나자고 했다.
국가의 기관인 조폐공사가 더 이상 국민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조폐공사 파업사건이 국민경제에 3조원의 손실을 가져왔다. 모든 것을 2주간 협상을 통해서 전부타결을 했다. 내가 갔을 때 조폐공사 한 쪽에서는 노조지도자들이 데모하는 것을 스타인양 TV에 방영되기도 했었다. 사장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TV에서 안 찍어 주는데 노조지도자가 쪽지하나만 보여도 TV가 방영한다. 그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이고 국가적 과업과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역적이 되어 있었다.
조폐공사가 1998년에 198억이라는 적자를 보았다. 지체상환금을 3억이나 물었다. 내가 와서 보니 7월에 몇억 정도의 흑자를 내고 이미 200억 정도는 적자가 나 있었다. 그런데 정말 눈물겹게 고마운 것은 우리 직원들 40%가 열심히 일을 해주었다. 내가 8월 2일에 부임했는데 8월에 36억원이 흑자가 났다. 9월에는 75억원의 흑자가 났다. 10월이 되니까 83억의 흑자가 나더니 11월에 103억의 흑자가 났다. 매년 12월이면 적자가 나는데 작년 12월에는 흑자를 냈다.
내가 사장으로 부임해서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 나는 열심히 할 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재경부에서든지 어디서든 간섭하면 그날로 그만두고 오겠다고 했다. 한국은행 총재를 만났다. 그분은 조폐공사 사외이사를 6년동안 하신 분이다. 그분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총재님 금년에는 Y2K가 있고 조폐공사는 항상 파업을 하는데 이번에도 1개월쯤 파업을 할 것입니다. Y2K도 있고 하니 3개월분 정도 재고를 확보해주셔야 합니다” 은행장들을 만나서 조폐공사가 파업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당신들은 수표가 1개월 분밖에 없으니 3개월분 정도 재고를 확보해라. 확보를 하지 못하면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했다. 외교통상부에 가서도 여권을 3개월분 비축하라고 했다.
이제는 이야기를 해도 될 것이다. 비밀리에 내 돈을 들여가면서 고인돌운동을 한다고 영국과 프랑스에 갔다. 일단 유사시에는 외국에서 화폐를 찍으려고 했다. 수표는 인도네시아에서 찍으려고 했다.
그리고 노조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당신들 40명과 나하고 똑같이 그만두는데 화폐는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미 재고가 확보되어 있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원가에 크게 변하지 않게끔 영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찍을 수 있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는데 지난 연말에 모든 것을 타결했다. 그러나 퇴직금 문제가 한가지 걸려 있었다. 지난 연말에 내가 사표를 쓰려고 하니 마지막으로 퇴직금 문제를 처리하라고 하여 조금 더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결산을 하고 보니 조폐공사가 4년전을 제외하고는 매년 공개평가에서 꼴등을 하였다. 금년에도 꼴등을 한다. 재작년에 우리가 198억 적자였는데 작년에는 407억 흑자를 냈다. 98년에 매출액이 1,240억이었는데 작년에는 일을 더했기 때문에 1,820억쯤 되었다. 그 1,820억을 1,200명이 감원되었음에도 불구 함에도 달성하였다.
407억 흑자를 내서 화폐의 단가를 170억 깎아 주었다. 우리가 경영을 잘해서 여러분들은 돈을 싸게 쓰고 있는 것이다. 퇴직금 체계를 개편하면서 210억, 명예퇴직금 82억을 하고 나니까 남는 게 3억 6천 밖에 없었다. 전임 사장이 너무 의욕적으로 167억 흑자는 내겠다고 계획을 세워놓았었다. 수출도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만큼의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나는 그런 지표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모든 잘못된 것을 금년에 털어 버리고 새로운 2000년대에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밝은 마음으로 우리 조폐공사의 천당을, 극락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마. 세계수준의 노사문화
이러다 보니 추석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설에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조폐공사가 구정에도 나와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금년에 우리의 이익목표가 390억인데 상반기에 이미260억 흑자를 냈다. 그리고 지난 연말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우리 직원들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42억이라는 돈이 남았다.
그것을 그대로 국가에 반납을 하면 나에 대한 평가가 좋아진다. 198억 적자에서 이렇게 많이 흑자를 냈으니까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밉지만 60%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예정에도 없는 전원 100%보너스를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돈이 남아서 전 사원에게 10만원 짜리 상품권을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돈이 남아서 간부들에게는 2만원 짜리 케이크를 하나씩 사서 주었다.
내가 서울에 가려고 보니 나는 부임한지 6개월이 안되어서 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총무부장이 오더니 “사장님과 사장님 기사는 규정에 의해서 근무기간이 6개월 미만이라 줄 것이 없어서 2만원 짜리 케이크표를 하나 더 가지고 왔습니다”하고 주기에 우리 집에서 밥해주는 아줌마를 드렸다. 그리고 빈손으로 떠나니까 우리 관리처장이 눈물을 글썽이더니 갑자기 배를 한 상자 들고 왔다. 자기한테 누가 선물한 것인데 그것이라도 가지고 가시라고 하였다.
관리처장이 이익금을 이렇게 사용하면 시말서를 쓰게 된다고 해서 내가 쓰고 그만두라면 그만두겠다고 하고는 과감하게 풀었다. 나는 열심히 해서 벌면 반은 우리국가 국영기업규모의 시설을 하거나 기술개발에 쓴다.
그리고 반은 사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3개월에 한번은 역사탐방이라 해서 300~400명씩 경주에도 데리고 갔다. 엊그제는 심한 노조원들 20명과 우리 모범사원 20명, 관계자와 함께 우리회사 직원 70여명이 금강산에 다녀왔다. 내년에는 모든 우리회사 사원 전원을 해외여행을 보낸다. 우리가 여권을 만드는데 여권을 가져 본 사람이 16%밖에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데 우리가 한번 써 보자고 했더니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만두라면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대신 열심히 일을 해서 정부가 약속한 것 이상을 하면 그 이상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분명히 이걸 시행할 것이다.
다음에 역사 탐방은 6월 1일날 김해로 간다. 어제 내가 그랬다. 김해 김씨들. 진주 정씨들. 진주 강씨들. 진주 하씨들은 오라고 했다. 새벽 일곱 시에 일어나서 선산에 성묘를 갈 사람은 오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오지 말라고 했다. 한국 사람은 조상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 원래의 정심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회사의 생산담당 이사가 강씨인데 희귀하게도 노조위원장도 강씨가 많다. 그 강씨가 강씨를 욕하고 침 뱉는다.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나는 이번 출장에 노조위원장과 노조 출신을 데리고 간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자는 것이다.
컵에 물이 있는데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컵이나 있구나 하는 사람이고 부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 컵밖에 없다고 했다. 여러분이 사위나 며느리를 얻을 때 긍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맞이해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조건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공동체적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금강산에 다녀와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저께 저녁에 노조 부위원장 집에 조문을 갔더니 사원들이 왜 간부들한테는 안가고 오느냐고 했다. 예수님 말씀에 “백마리의 양보다는 한 마리의 떨어진 양”이라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저기는 모로 가려고 칭얼대는 자식이니까 갔다고 하였다. 이런 것이 공동체적 문화형성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3. 공동체적 지역문화의 형성
결론을 말씀드리겠다. 장성군처럼 선각자적 군수님을 모시고 아주 좋은 한국적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적당한 규모로 지방행정을 하기 위해서 지역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장성다운 하나의 공동체적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자기계발과 자기혁신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왕에 장성 땅에 살려면 장성인 다운 공동체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장성인으로서의 보람과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또 한국사람으로서의 보람과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한국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다. 전세계의 면적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면적이 1.2%이다. 그 중에 한 민족이 1.3%다. 옛날에 만리장성까지 쌓아서 막았던 중국의 북방민족이 다 중국화 되었지만 한 민족은 남아있다.
한국사람이 잘못한 것도 있다. 어디를 가나 한국사람이 호텔에 들어가 있으면 시끄럽다. 음식만 해도 한국의 김치를 꺼내 놓으면 서양사람들은 코를 막는다. 200명이나 300명쯤된 교향악단도 사물놀이패 4명이 가서 꽹과리를 치면 판을 제압한다. 요새말로 하면 나쁘면 개판이다. 한국 사람은 이런 기질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한반도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한민족의 긍지를 지켜온 것이다.
조선시대의 재정에 중요한 것은 쌀과 면화와 소금이었다. 조선 재정의 3분의 1을 호남에서 댔지만 호남에는 양반이 별로 없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호남에는 별로 벼슬이 없다. 그만큼 중앙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었다 할지라도 호남인 다운 고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한국은 호남사람들의 생산력에 의해서 지켜졌다. 임진왜란 때 만약에 호남이 함락되었다면 싸우는 군대는 그만두더라고 선조께서 드실 수 있는 식량이 없어서 우리 조선은 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6.25 사변 때도 그때 마침 풍년이 들었다. 그나마 호남평야에 풍년이 들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겠는가? 후백제가 멸망한 후 우리 지역에서는 지금 김대중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국가 원수를 배출해 보지 못했고 소외되어 왔다. 전국에서 정승이 제일 많이 난 곳이 나주다. 여덟 분이 나왔다. 그러나 낳기만 거기서 낳았지 살기는 서울에서 살았다. 불행히도 호남은 이성계가 이조를 건국할 때 이성계의 혁명군 막하에 있던 사람들은 높은 사람이 없었다. 유일하게 충주 박씨 박순 이라는 분이 사무원 비슷한 벼슬을 했었는데 여섯 왕을 모시게 되었다. 그분 때문에 연줄이 대어져 이조초기에 벼슬길에 진출하게 되었다.
여기에 여러 성씨가 있지만 호남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되었다. 우리 호남인은 국가를 지탱하게 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런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한일전쟁 때도 의병들의 전투가 많았으나 한반도 전체에서 한 전투보다는 전라도에서 한 전투가 더 많았다. 그만큼 의병의 난이 많이 일어났다. 이러한 호남문화로서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장성은 그런 고문화와 더불어서 선비정신 그리고 불교와 유교가 농축되어서 한국적 민족정신과 한국적 문화를 가진 장성인들 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역사회를 잘 건설해야 모범적인 하나의 지역사회가 건설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러 가지가 시급하지만 지금까지 모범적으로 ‘장성 아카데미’와 같은 문화활동을 했다면 이제는 장성의 공동체적 문화를 개발하고 형성해야 될 때이다. 한민족이 이렇게 남은 것은 우리말을 가지고 있었고 문자가 있었고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장성이라는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 강사교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