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적인 자료

임금의 廟號인 祖와 宗의 풍수지리적 기원론

운 산 2005. 8. 20. 17:10
임금의 廟號인 祖와 宗의 풍수지리적 起源論
사론 김성규

조와 종의 차이는 무엇으로 근거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여러 각도에서 논란이 있어왔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조와 종의 차이를 공과 덕의 차이로 조명하여 왔다. 그러나 과연 단지 공과 덕의 차이로만 조와 종의 묘호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무엇보다도 왕조의 묘호에 왜 하필이면 조와 종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이에 대한 저간의 논쟁과는 전혀 새로운 가장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대안을 제안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임금의 칭호 뒤에 조와 종을 붙이는 것은 임금의 시호로 묘호라고도 한다. 묘호란 임금이 죽은 후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사용하는 존호로서 조(祖)와 종(宗)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조와 종이 어떤 때 붙이는가에 대하여 많은 주장들이 있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종과 더불어 조도 많이 나타난다. 주지하는 바대로 신라 때는 무열왕을 태종 무열왕이라고 한 적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태조 이외에는 모든 왕들이 종의 묘호를 붙였다. 중국에서도 사용했던 이와 같은 조와 종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11월조의 "공이 있는 이는 조를 붙이고 덕이 있는 이는 종을 붙였다"는 설명에는 많은 추가 질문이 생기게 된다. 무엇을 공으로 보고 무엇을 덕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 등은 정통 왕위 계승과 더불어 정변으로 인한 변칙적 국통계승에 대한 평가를 '덕'과 '공'으로 완곡하게 간접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와 종의 칭호는 왕조번창의 기원을 담은 음양풍수 사상에 깊이 연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조와 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조와 종의 풍수지리 사상적인 이미지에서 파악하면 아주 쉽게 접근할 수가 있다. 조와 종의 원천적인 어휘가 풍수도가적인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조와 종이 가지는 그 묘호의 차이를 금방 알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은 필자가 처음 밝히는 이론이다.

전통적인 왕궁터의 풍수지리적인 선택은 잘 알려져 있다. 뿐만이 아니라 왕과 왕비의 합방 날짜도 음양풍수적인 의미에서 찾을 수가 있다. 왕조실록의 왕의 칭호들에 있어서 조(祖)와 종(宗)을 붙이는 데 대하여도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그것들의 차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음양풍수사상에서 연유하는 조산(祖山)과 종산(宗山)의 이미지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양풍수에서 명당이 있으려면 명당의 좌우로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있어야 하면서 동시에 명당의 북쪽 편으로 宗山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宗山의 더 먼 곳의 기준이 되는 근원적인 산을 일반적으로 祖山으로 그 의미를 부여한다. 조산은 그 명당의 근본 출발점이 된다. 그러니까 새로운 대통의 시작점인 셈이다. 종산은 그러한 조산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산세의 맥을 말한다.

이러한 풍수적인 이론에 근거하여 왕조 가계에서 새로운 출발의 정치적 또는 혈통적 새 정통의 국통을 세우면 그 왕은 祖를 붙여야 했고, 거기에서 단절이 없이 정통 계승이 되었다면 그 왕은 宗 칭호를 붙인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혈통과 연관하면서 정치적인 정국변동과도 관계가 있다. 조와 종은 풍수 명당에서 지맥과 같은 조상의 혈맥을 말한다. 그러니까 조와 종은 현재의 임금에 대한 조상들의 맥을 말해주는 것이기에 죽은 임금에 대한 묘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풍수 지리사상에서는 祖山과 宗山을 이어서 主山이 하나 더 들어가야 한다. 현직 임금을 주상(主上)으로 표현하는 것은 주산 앞에 거하시는 임금(主上)을 의미하는 이미지를 지닌다. 주상이란 이러한 풍수적인 지맥과 정치적인 혈맥의 이미지에서 현재의 임금을 칭한 것에서 연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조와 종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왕통 계승의 풍수도가적인 지리적 위치와 같은 그 계승 의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세종대왕과 세조임금의 조와 종의 우열의 차이를 찾아내 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공식적으로 유교중심의 국가였지만 왕궁과 왕실의 무궁한 계승은 풍수음양사상에 깊이 연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가적 음양 풍수사상은 조정의 組閣에도 영향을 미쳐서 좌청룡 우백호에서 보는 것처럼 좌를 우보다 앞세우고, 음을 양보다 앞에 세우는 것으로서, 좌의정과 우의정의 정치적 위상 순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곳에서 왕실 내부 사상이 도가사상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임금의 위치란 바로 풍수지리사상에서 명당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산과 종산 그리고 주산으로 이어지는 음양풍수사상의 지맥을 바탕으로 명당에 임금 양위분이 거하는 것이다. 그 명당의 좌우에는 좌청룡 우백호의 양맥이 뻗어 있다. 따라서 영의정이란 명당 전면에서 임금을 대리하는 위치이면서도 동시에 그 명당을 지키는 '참봉'의 이미지가 있다. 거기에 영의정을 보필하는 좌의정 우의정은 그 명당을 호위하는 좌청룡 우백호로서 주상을 보필하는 양날개의 형국을 정치적으로 펼친 것이다.

유교사상은 양을 음보다 앞에 두어 남자를 여자보다 앞세우며, 우를 좌보다 앞에 내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정치 사회인 조선조에서 이렇게 왕실의 도가정치적 이미지 구조 속에는 우보다 좌를 앞에 세워 좌의정을 우의정보다 앞세운 것은 그대로 음을 양보다 앞세운 좌청룡 우백호의 음양풍수 사상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조선조 임금이 거하는 대전 용좌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왜 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일월은 왕과 왕비를 의미하고 오악은 바로 조산-종산-주산-좌청룡-우백호 다섯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왕의 묘호에 조와 종을 붙이고 현임 왕은 주상으로 칭하며 임금을 대행하는 영의정을 중심으로 좌의정 우의정의 배열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정승은 왕실의 가맥에 연결되어 있는 왕가의 가족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조와 종을 논할 때는 주상의 의미와 좌의정 우의정의 의미와 더불어 일월 오악의 정치 이미지를 함께 논하여야 할 것이다. 왕실의 정치구조는 왕실의 무궁한 계승번영을 의미하는 음양풍수 도가적인 사상의 정치이미지에 대입한 내용이다. 이렇게 조선왕조의 조(祖)와 종(宗)의 묘호 속에는 조선왕조의 무궁한 왕조계승의 음양풍수 도가적인 사상적 기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결정하는 정치적인 일에 대한 결과를 너무 법칙적으로 보지말고 그 사상적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 한 사람이 결정한 것도 아니고 세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결정한 사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조선왕조실록도 바이블만큼 세대가 다른 저자간의 통일된 규칙이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나 중국에서의 관행과는 달리 조선시대 왕실사상에서는 도가중심적인 전통이 보다 강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의 관행들을 보다 구체화했다고 할 수 있다. 긴 왕조시대에 끼친 한 왕조의 통사에 미친 사상적 영향은 전체적인 그 흐름을 봐야 할 것이다.

신구약 성서가 창세기 일부에 '다신관'이 포함되어 있으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이블의 사상의 영향을 말할 때 그것은 '유일신' 중심사상에 관한 기록으로서 그 전체성에 기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도가사상은 조선왕조 왕실정치 이미지의 내부적인 중심사상이었다. 법칙으로 보거나 규칙적인 사항으로 볼 일이 아닌 그 사상적 영향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세조 때는 도교의 책들을 수거하였는데 어떻게 왕실 내부에서 도가적인 사상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같은 통치권 내부의 사정은 불교정책에 대한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는 주지하는대로 처음부터 억불숭유 정책을 썼다. 그러나 조선조 전반기 왕실내부에서는 불교의 숭상이 계속되었다. 내불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한글을 창제하고도 그 최초의 기본 택스트로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 불교서적들을 먼저 발행하였다.

민중은 수치의 예를 지켜야 하나 왕은 꺓ツ죩의 지존이라는 예를 들지 않더라도 민중에 대한 정책과 내부 왕실의 정책은 다른 가치 규준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 전통 사상에서 자손이 이어져야 하는 가문의 번창을 위하여 가장 영향을 미친 사상은 음양풍수의 도가적인 사상이었다. 왕실의 혈통적 승계는 불교사상이나 유교사상으로는 미진한 남녀방중사와 조상과 후손의 연결 등의 사상을 음양풍수사상에서 찾고 있었다. 이러한 남녀 중심의 도가사상은 그 영생불사에서도 남녀가 공히 함께 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영생사상(sexual immortality)에서 찾고 있었다.

이것은 혈통 계승을 바탕하는 왕실의 번영에 있어서 중요한 비밀사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실이 아닌 일반 민중들이 이같은 도를 행하면 왕실을 반하는 또 하나의 꺙?이 명당에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일반인들에 대한 풍수도가사상의 극단적인 심취를 저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풍수사상을 민간에서 간접적으로 허용하되 명당이라도 적당한 명당만이 허용되었다고 할까.

그것은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조산과 종산 그리고 주산과 명당의 관계를 연계하면서도 현실의 왕과 왕비를 중심한 왕실 혈통 계승을 위한 기원사상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조종 묘호에 연관한 도가사상적 배경에 대한 독보적 관점은 확실한 관련 연구 결과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조와 종의 도출 배경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혈통계승에서 자연스러운 왕통계승이 아닌 계승이 이루어졌을 때는 풍수에서 새로운 왕기를 일으키는 조산의 정립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한 왕의 묘호는 조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왕통 계승의 혈통이 자연스럽지 못했거나 종묘사직이 흔들리는 커다란 혼란이 없었을 때는 조산에서 그대로 왕계의 지맥와 용맥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종을 묘호로 새운 것이다. 따라서 왕조의 처음은 무조건 조를 묘호로 한 것은 물론이고 혼란 속에 왕계를 재정립한 양상이 된 왕들은 조를 묘호로 한 것이다. 그러한 조의 맥을 대체적으로 평탄하게 이어받았을 때는 종을 묘호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는 출발 또는 재정립의 의미로서의 조상이며 종은 종가집을 말한다. 이것은 조상을 잇는 종가집 사상으로서 조산과 종산을 이어내려오는 음양풍수 사상에 연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임금의 심벌인 용은 땅에서 솟아오른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조종의 지맥을 잇는 명당을 중심한 왕가의 음양풍수사상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필자의 이러한 견해는 조종 묘호 연구에 관한 획기적인 의견이라고 자부한다.